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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누각 안양루에 오르다
서늘한 기운 감도는 새벽녘 안양루 비 맞은 뒤 청산은 씻은 듯이 선명하네 멀리 안개 속에 동네 인가 잡힐 듯하고 동남 하늘 구름은 바다처럼 연이었네 먼 하늘 아득히 나는 새 바라보고 스산한 가을 정취 매미소리 듣네 만고의 명승지 나그네 발걸음 올해 중속 밝은 달도 활처럼 기우네
이 시는 성언근(成彦根, 1740~1818)이 쓴 시‘안양루(安養樓)’ 이다.
30년 전 조부(祖父)의 손에 이끌려 힘겹게 오르던 부석사의 흔적들이 가물가물 내 기억의 창고에서 걸어나와 햇살처럼 쏟아진다.
오늘같이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날이면 지난 기억은 아련하지만 조부의 그 체온은 아직도 내 가슴을 데워주고 있다.
아침 일찍 안양문(安養門)을 밟고 무량수전에 오른다.
이 문을 밝고 지나간 숱한 사람들의 흔적과 가슴 아린 눈빛들, 그 낮선 눈시울에 넉넉한 위안을 주었던 늙은 두리기둥들, 안양루에 올라서면 처마에 걸린 소백의 연봉들의 그 끈질긴 생명력 앞에 숙연히 마음 한 자락 내려 놓고 싶어진다.
안양루로 오르는 계단은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의 축에서 좌측으로 약30。가량 꺾여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을 절선축(折線軸)이라 하는데 부석사 공간구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것은 우리 전통 건축에서는 다소 파격인 만큼 과감한 처리인데 별로 어색하지 않다. 이렇게 축이 굴절된 예는 김천의 직지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부석사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산지 가람을 하고 있으나 전체의 배치축은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무량수전과 안양루는 중간축에서 17。정도 남향을 하고 있다.
이끼 낀 역사가 아직도 채 잠에서 깨기 전 백척(百尺)누대 안양루(安養樓)에 오르면 한가한 구름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바람과 벗한다. 안양(安養)! 아미타 불의 정토(淨土), 극락세계의 별칭.
층층이 솟은 바람누각 안양루에 햇살이 쏟아지면 누(樓)에 올라 난간을 의지하고 앞 산 봉우리 헤아려 보니 속세의 찌든 때 아득히 사라진다.
너그럽구나 소백의 연봉(連峰)들이여! 부럽구나 안양루여! 너 만은 산과 하늘과 구름의 마음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우뚝한 누각 의젓함이 하늘과 귀신의 조화같고 스무분 공포불(拱包佛), 열두 분 벽화불(壁畵佛), 둥지튼 보금자리 안양루. 안양루에 오르면 마음은 한 순간 비워지고 번뇌는 산 파도에 지워진다. 인간사 무엇이 남고 또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안양루는 내게 빈 마음이 되라 한다. 오늘도 바람 누각 안양루 공포불엔 불심이 내리고 벽화불엔 그리움이 일어난다.
안양루에 긴 바람 불어와 검은구름 쓸어가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으면 인자한 공포불 환한 미소 지으며 저 만치 산 바다를 향해 손짓을 한다.
옛 자취 그리운 안양루에 황혼이 들고 구름 끝에 푸른 산들이 짙푸름을 더해가는 오월의 절집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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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와 연봉을 거느린 하늘누각
안양루는 1555년(명종10)에 화재로 인해 불탔다가 1596년(선조 9)부터 1598년(선조 11)까지 석린(石麟)스님이 안양루를 중창하고 사명대사가 중창기를 썼다.
일찍이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서른 일곱의 젊은 나이로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를 쓰면서 안양루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안개가 끼고 서리가 내린 가을,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으면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가는 듯하며, 길은 천리가 되며 몸은 푸른하늘 위에 있어 하늘에 올라 구름에 타는 듯하다.
서쪽으로 소백산을 바라보면 저녁비에 고운 빛깔은 등왕각의 운치가 있고 동쪽으로 청량산을 바라보면 가을 구름이 자욱해서 종산의 맛이 나니 길손은 고향을 생각하게 되고 외로운 신하는 나라 걱정을 하며 임금을 그리워하게 된다.
도사(道士)가 이곳에 오르면 환골(換骨)하지 않아도 곧바로 찬 바람을 타게 될것이요. 승려가 이곳에 오르면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선정(禪定)에 들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누각 이루어짐으로 인해 갖가지 즐거움이 구비되거니와 하필이면 어진 이름을 얻은 이후에야 이를 즐길 것이다. 하늘에 올라 구름에 탄것같은 기분이 사로잡히는 곳”
안양루는 그렇게 그리움가진 사람들의 벗이 되어 천 년을 흘러 왔다.
바람이 안양루 난간을 타고 휘돌아 불어와 번뇌와 시름을 하나 둘 몰고 가면 둥둥둥 고요한 절 집에 긴 법고소리가 석양을 재촉하고 어둠이 이내 종종걸음으로 산등성이를 넘어 절집으로 달려온다.
밤마다 외로운 구름은 바람 난간 안양루에 깃들어 돌아오지 않는 바람을 밤새워 기다리다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난간 밖 자목련은 붉게 물들어 지는 해와 더불어 하늘하늘 떨어지고 꽃구름 같은 신라 천 년도 나그네의 푸른 옷깃에 뚝뚝 떨어져 내린다.
안양루는 조선 중기 누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다포집이지만 조밀함이 잘 나타나 있어 구조와 양식에서 조선중기 이전에 세워진 건물로서 고고함과 단아함을 두루 갖추어 날아갈듯 경쾌하게 보이는 바람 누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안양루는 1916년 루 아래 돌계단이 놓이기 전에는 루의 기능만 하다가 계단이 놓이고 난 후 부터 문의 기능도 같이하게 되었다.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안양루로 오르는 길 오른쪽엔 응향각(凝香閣)이 있는데 이 응향각은 무량수전 동편에 있다가 안양루 아래로 옮겼다. 처음에는 강원(講院)이었으나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계단에 인접해 있어 지난 1980년 철거하여 5m정도 물려서 요사채 용도로 신축했다.
과거 응향각은 정면 3칸, 측면 5칸 규모의 굴도리 집이었으나 새롭게 신축하면서 정면 5칸, 측면 1칸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바뀌었으며 최근 전면에 마루를 덧달았다.
이 응향각은 절에서 부처님에게 아침, 저녁으로 향을 사르며 예불을 모시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건물로 법당 옆에 있는것이 통례이며 향로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향을 사르며 예불을 모시는 스님을 노전스님이나 지전(持殿)스님이라 부르기도 했다.
올라서면 “안양루”, 내려서면 “안양문”
서방정토 안양의 세계에 이르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
안양루에는 두장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부석사(浮石寺)’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부석사 방문시 쓴 친필이고 ‘안양루(安養樓)’는 지난 1974년 가을 고장 출신인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1901∼1985) 선생의 작품이다.
바람 누각 안양루에는 퇴계 이황의 ‘조사당운(祖師堂韻)’, 삼학사(三學士)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의 ‘조전차운삼수(祖殿次韻三首)’, 풍락정주인(豊樂亭主人)의 ‘부석사’, 김삿갓의 ‘부석사’ 시(詩)판들이 걸려있다.
각수(刻手) 해전(海筌)이 각(刻)한 ‘재목대시주(材木大施主)’ 현판도 걸려 있다.
깎아 세운 석축 천 길이나 섰는데 구름과 노을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안양루에 서면 청산은 저만치 마주서서 아롱아롱 가슴에 눈물 고이게 한다.
자목련 꽃잎은 바람 난간 안양루를 올려다 보며 사랑을 고백할 듯 말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져서 삼 백 예순일을 그리움에 떠는구나.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남쪽 만석산(萬石山), 학가산(鶴駕山), 대마산(大馬山), 비봉산(飛鳳山), 옥녀봉(玉女峰), 매방산, 향로봉은 금세라도 웅장한 산 파도가 되어 몰려와 수 많은 사연을 내려 놓을 것만 같다.
누대는 높고 하늘은 낮아 가슴이 저려오는 애틋한 사랑, 그 그윽한 매화 향기 안고 무량수전 경쇠에 안양루가 감겨온다.
마음과 마음, 사람과 하늘이 통해 방울방울 그리움이 일어나는 곳. 안양루에 서면 봄은 벌써 저 푸른 산 기슭 너머로 소리없이 가고 있다.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부석사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오듯 우주간에 내 한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 백세에 몇번이나 이런 경관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글. 김태환(金泰煥) 시인,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영주시사편찬위원, 영주문화원 이사, 월간『소백춘추』편집국장, 영주문화유산보존회장, 저서로 《부석사 그리움은 풍경으로 흔들리고》(2004년), 《청량산 청량사》(2005년), 《영주의 선비정신》(2005년), 《봉화의 전통마을》(2006년) 《덕은 외롭지 않다》(2005년), 《회송헌 선생 실기》(2003) 외 다수. |